“여보, 할 말이 있는데..”
아내가 밥먹다 말고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예감이 좋지 않다. 아내가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하면 항상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으로 끝나곤 한다.
“무슨 할 말? 난 자기가 그렇게 말 꺼낼 때마다 무서워.”
괜히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아내는 항상 이렇게 어렵게 말을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할 말이 있으면 요점을 정확하게 말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빙빙 돌려 말을 한다. 표정을 살피고, 행간을 읽어가며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파악해야 하는데, 아내를 알게 된지 9년이 되어도 여전히 어렵다.
아내는 목소리를 깔고 더 진지해졌다.
“우리집에 방이 4개가 있잖아. 안방, 애들방, tv방, 서재. 근데 나는 방을 좀 바꾸고 싶어. 안방하고 애들방하고 바꾸자. 안방이 볕도 제일 잘 들고, 크기도 제일 크니깐 애들 장난감도 다 들어가고, 애들도 신나게 놀거 아니야. 애들방을 자기 방으로 해. tv방을 내 방으로 할게. 서재는 옷방으로 하자.”
“뭐? 내 방? 자기 방? 그럼 우리 방은?”
“우리 이제 좀 솔직해지자. 우리가 결혼하고부터 같이 한 방을 쓴 적이 없잖아.”
하긴 그렇다. 결혼하자마자 신혼여행 다녀와서 허니문베이비가 생겼고, 아내는 임신한줄도 모르고 유럽 출장을 2주나 다녀왔다. 그리고 신혼집에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하자마자 입덧을 했다. 그 입덧이라는 놈이 얼마나 고약한지 아무것도 못먹고, 물도 못 삼키고, 냉장고만 열어도 냄새가 난다며 화장실로 가서 연신 구역질을 해댔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나한테서 남자 냄새가 난다며 또 구역질을 하러 갔다. 그 길로 아내는 딴 방에서 잠을 청했다. 입덧이 끝나고 다시 한 방 생활을 시도해 보았지만 며칠 못 갔다. 아내가 임신했다고 밤새 화장실을 어찌나 들락거리는지, 옆에서 나도 덩달아 잠을 푹 못자니 회사에서 피곤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아기 낳을 때까지만 각방을 쓰기로 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내심 정말 기뻤다. 이제는 아내와 같이 잘 수 있겠구나 싶어서. 아내와 같이 자고 싶어결혼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결혼하고 오히려 더 순결해졌다. 이제 아기는 우리가 멋지게 꾸며놓은 저 아늑한 아기방에서 아기침대에서 사랑스럽게 잠이 들 것이고, 나는 이제 침대에서 내 아내를 되찾을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아기를 겨우 재워서 조심스레 아기침대에 눕히면 1초도 안되서 아기는 앙앙 울어댔다. 다시 자장가를 부르고, 안고, 업고, 그래도 안되면 젖 물려서 겨우 잠이 들면 다시 아기침대에 눕혀본다. 눕히면 또 엉엉 울어댄다. 왜! 왜! 왜! 도대체 밤에 잠을 안 자는 거야!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다. 밤새 그러고 있다. 어느새 아내는 아기침대 옆에 바닥에 이불을 펴놓고 혼자 잠을 청하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푹 자는게 낫지 않겠어? 자기는 내일 회사 가야 되잖아. 물론, 나도 내일 일하기는 하지만. 자기 방에 가서 문 닫고 자기라도 푹 자. 나한테 미안하면 내일 맑은 정신으로 집안일이나 좀 더 해줘.”
그 날 이후로 결혼생활 6년째인 지금까지 우리는 각자 자고 있다. 아내는 아이방에서 바닥에서 커다란 요를 깔고 아이와 뒹굴며 잠을 잤다. 나는 이름만 부부방인 부부방에서 킹 사이즈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잤다. 물론, 밤새 같이 잠을 자지는 않을지언정 가끔 아내가 침대에 놀러오는 경우는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래. 우리가 각자 잔 건 맞아. 근데 그건 애들 땜에 그런거고 이제 같이 자야지.”
“나 자기랑 같이 못 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한번씩 이 여자가 정말 한국여자가 맞나 싶다. 한국 여자들은 남편 의견에 토도 잘 안 달고, 잘 맞춰주고, 애교라는 것도 있다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내는 그런 구석이 하나도 없다. 아내가 남편한테 같이 못 잔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저렇게 당연하게 말할 수 있다니!
“생각해봐. 자기는 열이 많은 사람이야. 그래서 걸핏하면 에어콘을 틀어 대잖아. 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괴로워. 그리고 자기 침대에 누워서 폰으로 넷플릭스 밤12시까지 보고 자잖아. 나는 폰 불빛 있으면 못 자.”
사실은 사실인지라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 방, 내 방 따로 있으면 각자 하고 싶은거 하고 각자 편하게 자면 좋잖아. 나는 내방에서 하고 싶은거 하다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애들이 나랑 같이 자고 싶어하면 애들도 내방에서 같이 자고. 자기는 넷플릭스 맘껏 보고 자. 이 참에 자기 방에 컴퓨터를 아예 넣자. 컴퓨터로 넷플릭스를 봐. 폰으로 영상 오래 보면 눈에도 안 좋고.”
“자는 방에 컴퓨터를 왜 넣어? 내가 원룸생활하는것도 아닌데… 지금도 괜찮은데 왜 굳이 방을 바꿔야 돼? 그리고 부부가 각방 쓰면 안되는 거잖아.”
“여보, 이제 좀 솔직해지자니깐. 우리가 지금까지 이혼 안하고 비교적 잘 살고 있는건 각방 쓰고 있는 덕택인거 몰라? 우리가 한방 썼어봐. 맨날 에어콘을 트네마네 하면서 싸우고, 옆에서 코를 고네마네 하면서 싸우고, 폰 많이 본다고 잔소리하고 그랬을거 아니야. 자기 기억 안나? 전에 내가 잘때 숨을 크게 쉬어서 숨소리 거슬려서 못 잔다고 그랬잖아!”
연애할 때는 이 여자가 똑똑해서 좋았다. 기억력도 좋고, 책도 많이 보고, 언어도 몇개 국어를 하고, 그것도 내가 몇년을 노력해도 도무지 늘지 않는 중국어가 유창하고, 한자를 척척 읽어낼 때는 멋져보이기까지 했다.
9년을 알아온 지금은 아내 기억력이 심히 부담스럽다. 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다음날이면 잊어버리는데, 아내는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걸 적재적소에 써먹고 매번 나를 KO시킨다.
아내는 한번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이다. 결국 엉덩이 무거운 나를 일으켜 세워 각 방에 모든 가구를 새롭게 배치했다. “잘한다! 잘한다! 우리 남편 없었으면 어쩔뻔 했어!” 이러면서 아내가 호들갑을 떤다. 아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아내가 하자는대로 다 하고 말았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아이방에 아이들 물건을 다 넣었다. 2층 침대에 놀이텐트, 크고작은 인형에, 자질구레한 장난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도 제일 큰 방이다 보니 제법 여유가 있다. 볕이 잘들어 따뜻하고, 놀이 공간도 충분하다. 애들은 벌써부터 들어와서 어질러대며 놀고 있다.
내 방은 예전의 아이방. 그러니까 가장 후미진 구석방이다.
“자기는 열이 많으니까 여기가 적합해. 여기가 우리집에서 제일 추운 방이야. 여기서 컴퓨터 맘껏 하고 자고 싶을때 자면 되겠네.”
정말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헷갈리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믿기로 했다.
아내방은 예전의 TV방이다. 중간방이고 커텐이 이중으로 되어있어 우리집에서 가장 따뜻한 방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에게는 제격이다. 아내는 그 방에 자기 짐을 다 가져다 놓았다. 연주용인지 장식용인지 모르겠지만 피아노, 우쿨렐레, 바이올린하고, TV, 작은 책장과 옷장, 서랍장, 이불장까지. “이렇게 보니 예전에 대학생 때 원룸에서 자취할 때랑 똑같다!”며 아내는 연신 감탄하고 있다.
“여기는 이제 내 방이야! 내 방에는 이 칙칙한 커텐을 떼고 내가 좋아하는 노랑색 커텐을 달거야. 맨날 자기가 고집해서 온통 칙칙한 회색 커텐만 달아서 마음에 진짜 안 들었거든. 여기는 내 방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거야.”
저렇게 기분 들떠있는 아내의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예전에 연애할 때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는데.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에 방을 만들어 줄걸 그랬다.
참, 아내 방, 내 방이 생기고서부터 아내가 부쩍 내방에 자주 놀러온다. 나도 컴퓨터를 하다말고 반갑게 아내를 맞이한다. 아내를 안고 있으니 예전에 한참 연애할 때 자취방에 놀러오던 때처럼 설렌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이러다 셋째 오면 진짜 큰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