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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도도한 그녀는 오데로 갔나

아기 낳기 직전까지 내 잘난 맛에 취해서 도도하게 살았다. 하고싶은 거 거진 다하고 살았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었고, 돈이 쓰고 싶으면 돈을 썼다. 직장이 마음에 안들면 굳이 참지 않았다. 내 마음에 맞는 직장을 골라 다녔다. 외국어가 필요하면 외국어를 배웠다. 취미 하나에 꽂히면 내가 가진 시간과 열정을 불태웠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어디든 떠났다. 중국 북경 오리가 먹고 싶어 주말에 훌쩍 베이징을 다녀오기도 했으니까. 연애도 프랑스 남자를 만나서 그렇게 영화처럼 불같은 사랑을 했다. 그때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화려하게 살았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허나 아기를 낳고나니 내가 알던 세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아기를 위해 존재하는 그저 젖과 자궁을 가진 인간 암컷일 뿐이었다. 젖먹이 엄마에게는 어떤 고차원적인 교육도, 교양도, 문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것보다는 그저 아기가 먹을만큼 젖이 철철 잘 나오고, 아기를 안고, 업고, 젖 물리고, 재우고, 놀아주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같은 일련의 육체노동을 견뎌낼 건강한 체력만이 절실했다.

좌절했다. 이전에 내가 중요한 것이라고 믿어오며 쌓아왔던 지식과 경험들은 하나도 쓰잘데기가 없었다. 유학을 가고, 4개 국어를 하고, 외국계기업에서 해외영업을 하고, 프랑스 남편과 결혼한 것, 숱한 해외 여행 경험과 추억들은 오히려 육아에 걸림돌이 되었다. 하루종일 하는 말이라고는 아기하고 몇마디 나누고, 동요 몇 곡 부르는게 다인데 4개 국어가 무슨 소용이랴. 게다가 외국인 남편까지 내가 챙겨야 하는 처지라서 남편에게 의지할 수 없어서 외로웠다. 또한, 해외출장이 잦은 직업은 엄마껌딱지 아기를 둔 엄마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아기와 집에 갇혀 있으려니 오히려 답답함만 더해갔다. 차라리 예전에 그 넓은 세상을 안 봤더라면 그런 세상이 있는지도 모르고, 이게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마음 편히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은 예전의 나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다. 가끔 재미있는 모임이 있으니, 행사가 있으니 나오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애엄마가 뭐 그렇죠. 애가 어려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거절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애기엄마되고 다 변해도 그대는 진짜 안 변할 줄 알았다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고요. 이 아기에게는 내가 세상의 전부이고, 엄마 노릇은 나 대신에 아무도 해줄 수가 없는데요. 이건 진짜 돈으로도, 다른 사람 대타로도 해결이 안되는 문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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